연기와 관련지어 사물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상이 ‘공’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집착하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보고 고유한 실체로 인식한다. 도자기를 예로 들어보자. 도자기는 흙과 불로 만들어낸 그릇이다. 그러나 도자기는 그저 흙과 불로 만들어진 그릇일 뿐, 꽃병으로 사용한다면 더 이상 도자기가 아니게 된다. 이 때 도자기에는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다고 하고 이를 ‘공’이란 말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도자기(만물)와 흙과 불(인연)에 상호 의존하여 결합된 것이며 독자적인 실체가 아님을 주장한다.
인도의 승려 용수의 저서인『중론(中論)』에서는 공의 증명을 위해 무자성이라는 근거를 내세운다. 무자성은 자성 -독립하는 실체- 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가 공사상을 드러내는 방법론은 평이하지 않다. 그는 사물의 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공성 자체를 적극적으로 논구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공성을 부정하는 실체론적 입장을 취할 때, 다시 말해서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가정할 때 드러나는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공사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언어는 전체와 합일되지 않는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언어는 편의를 제공할 뿐 그 실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그들이 가진 사고를 말로 표현하는 습성을 통해 모든 존재에 실체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의 언어관은 일상 언어와 그 말에 대응하는 불변의 실재를 가정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며 ‘공’ 사상을 주장한다.
Ⅴ. 맺으며
장자와 불교의 사상에서 언어는 언어·개념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을 언어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매체로써 반드시 재정립되어야 했던 중요한 부분이다. 언어로 정의·규정된 대상은 인간의 사유 안에서 부분 규정된 개념으로만 인식이 되어, 그 부분 규정된 개념 이외의 대상 파악이 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언어·개념으로 생긴 분별로 인하여 이러한 대상 파악에 대한 문제점이 더욱 더 심화되고, 이러한 사유가 습관화 되면서 일상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들의 언어관은 기존에 있었던 가치관들 - 유가 사상, 브라만교(& 설일체유부) -의 고정된 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유의 공통점이 있지만, 장자는 그의 언어관을 통해 그 당시 사회와 도덕 등의 해체를 시도했지만, 그가 해체해 왔던 것들이 자신이 설정한 도(道)로 인하여 서로 모순관계에 빠지고 완전하지 못한 해체를 이루었다. 반면, 나가르주나는 ‘공’사상을 통해 이상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탈피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완전한 해체를 시도했다. 이는 앞서 지적했던, 장자의 불완전한 해체의 한계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비슷하다. 진한시대,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장자의 사상은 중국 불교에 일부 편입되면서 그 사상적 맥락이 직접 이어지지 못했고, 일부는 도교(道交)로 종교화되어 다른 맥락으로 이어져 갔다. 이것이 불교로 인하여 장자의 불완전한 해체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장자의 사상과 불교의 사상이 서로 융합되면서 공동체에서 개인으로의, 개인의 깊은 내면으로의 도달에 힘을 실었고, 이는 다시 공동체로 팽창시킬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