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그 한계
그러나 장자는 도(道)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벗어나 이야기한다.
누가 말하지 않는 말과 도(道)라 하지 않는 도를 알겠는가?
장자는 이러한 언어를 기본으로 하는 분별의 해체를 당시 사회에 뿌리 박혀있던 국가체계·도덕윤리 등을 해체하려는 시도로까지 확장시켰다. 하지만 장자는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인 도(道)를 다시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회귀시켰다. 때문에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형이상학적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불완전한 해체는 결국 언어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역설에 도달한다. 이로 인하여 장자는 ‘비언어적 경험의 언어화’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위에서 언급한 역설과 은유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역설의 과정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미 전달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이는 말과 뜻의 층위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이 또한 완전한 해체를 이룰 수 없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자는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다시 형이상학적인 요소로 회귀했고, 말로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오류를 인지하면서도 말을 사용하려 하던 모순·역설적인 측면에서 그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옳고 그름을 우리가 판단할 수 는 없지만, 그의 해체적 사유와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상관관계에서만 놓고 보았을 때, 그의 사유 안에서 개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의문인 것이다.
Ⅳ. 불교의 해체적 사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십이연기를 바탕으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 중 첫 번째 방법이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십이연기의 개념을 서로 연관시켜 설명하고, 사성제를 크게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으로 분류한다. 유전 문은 중생의 생사유전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成諦)로 구성된다. 고성제는 무명(無明)에서 노사에 이르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집성제는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형성된 허망한 생각들이 탐욕에 의해 모여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조작되고 있는 것이다. 환멸문은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멸하여 본래적인 삶으로 환원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고, 멸성제(滅性諦)와 도성제(道性諦)로 구성된다. 허망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것을 없애야 하는지 차례로 생각하여 무명을 없애면 더 이상 없앨 것이 없다는 것은 멸성제이다. 무명을 멸하여 사유하니 차례로 십이지가 멸하여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도성 제이고 즉 팔정도이다. 유전문은 십이연기에 의해 형성된 업(業)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윤회가 있다. 이로 인해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중생들이 무명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애착에서 나오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세존은 유전문을 제시했다. 하지만 삼계가 있기 때문에 극복하지 못하는 생사윤회(生死輪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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