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가 잘못된 정보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책을 읽지 않는 습관과 스마트폰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버스안에서, 지하철안에서 핸드폰 보다는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서 가고 있는 버스 안에서도 하는 경우가 있고, 걸어가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기술이 발달한 시점부터 우리는 포박되어 있는 죄수가 한쪽벽면의 불빛을 통해 그림자를 보듯이 고개 푹 숙여 스마트폰 화면의 빛을 통해 정보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보는사람=강의를 듣는 사람(동굴밖을 나간 사람)은 책이나, 강의를 추천하고 강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읽지 않고 강의를 듣지 않는다. 강의와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배우는 것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자전거를 배울 때 반나절이면 배울 수 있다. 반나절만 배운다면 혼자서 자전거를 타는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영어나, 독일어, 히랍어는 배우는데 반나절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꾸준히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한다. 배우는데 어려운 공부는 고통이 따르기에 사람들이 고통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영상을 접하게 된다. 물론 영상을 통해 보는 것은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순간적인 집중력을 상승시키기는 하지만 영상이라는 자체는 그림자의 빛처럼 보이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야만 하고 다른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없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 한다면 우리가 죄수의 입장에서 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플라톤은 한쪽 측면에서만 보지말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봐야지 진정한 본질을 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다양한 측면이란 한쪽벽만을 바라보는 죄수와 다르게 동굴을 나갈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의지를 가지고 실천함으로써 고통은 발생하지만 이것은 본질을 앎으로써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
Ⅳ. 결론
필자가 플라톤의 이데아 수업을 듣고 생각을 해 본 결과 우리가 정보를 얻을 때는 많고 많은 정보 중에서 골라야 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서 우리가 정보를 얻기 위한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이 없이는 한 쪽벽만 바라보는 죄수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는 곧 제3자의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로 받아들여 인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를 생각을 할 수 있다. “필론의 돼지”는 이문열 시인의 소설책 중 하나이다. 이 소설책은 출판도 했고 많은 독자들도 필론의 돼지의 줄거리, 독후감, 주제, 전문, 느낀점, 감상문등으로 연관검색어로 등장한다. 과연 이 표현이 맞는 것인가? 다들 그렇게 사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피론의 돼지”가 맞는 표현이다. 이렇게 많은 정보들이 있음에도 잘못된 정보로 알고 있는 것이 많다. 이처럼 한 개인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개인이 잘못알고 판단하면 개인에서 다수로 옮겨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데아를 잘 알고 있으면 현대사회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거나 설득하지 않을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책과 강연으로 이데아를 한정을 지었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행동자체 또한 이데아라고 할 수 있다. 이데아란 본질, 즉 하나의 것을 아는 것인데 정보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자신이 보고 있는 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 자체가 그 정보자체를 의심하고 생각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론이 고대에 적용하는 것도 맞지만 지금 현실에 적용되어야 할 최고의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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